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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지원

근로장려금 체험 수기

by MBTI알리미 2022.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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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에서는 매년 근로장려금을 수급한 사람들에게 체험 수기 공모전을 개최하여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정말 성실히 근로한 분들의 사연이 당연 돋보였는데요. 근로로 장려금이 실 생활에서 어떻게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지 이금주 님의 이야기를 함께 보겠습니다.


갑작스러운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저는 부산에서 상경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는 스물세 살 대학생입니다. 저는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남들과 전혀 다를 것 없이 아버지, 어머니, 오빠와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던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마흔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알코올성 간경변증을 진단받으셨습니다. 어렸던 저는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병을 진단받으신 이후부터 부모님을 자주 뵐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셔야 했기 때문에 집에는 저와 오빠 둘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오빠가 야간 자율학습으로 인해 늦는 날이면 저는 이대로 영영 가족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움에 떨며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오랜만에 퇴원을 하시고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저는 네 식구가 오랜만에 다 모일 수 있다는 생각에 전날부터 큰 기대를 안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 부푼 기대와는 달리, 아버지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심각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저와 오빠를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계속 집안을 돌아다니시며 이상 증세를 보이셨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아버지의 상태는 점점 더 심각해졌고, 급기야 욕을 하며 공격적인 증상을 보이셨습니다. 이는 일종의 혼수상태였던 것입니다.

결국 구급차를 불러 다시 아버지는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그제야 어렸던 저도 아버지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병을 진단받으시고 계절이 채 바뀌기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근로-자녀-장려금-공모전-체험수기

저는 우리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늘 저를 데리고 이곳저곳 다녀주셨던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직 아버지께 교복 입은 모습도 보여드린 적 없다는 것이 사무치게 슬펐지만, 그보다 더 슬픈 건 장례식장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딸과 고등학생인 아들이 있는데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얼마나 처참했을까요. 아직도 감히 상상해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저희 가족에겐 가족 여행이나 외식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매일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오빠와 저는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도 다닐 수 있었지만, 늘 마음 한편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는 풍경도 보지 못한 채 늘 한자리에서 장사만 하셔야 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쓰라렸습니다.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공부를 하면서도 어머니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시지 않아도 될 텐데, 내가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취업을 한다면 어머니가 조금은 더 빨리 편해지실 수 있을 텐데…….’ 늘 저는 좁은 공간에서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저의 학업으로 인해 어머니가 더 힘들어지시는 것 같아 늘 죄책감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을 키우고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이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공부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진다면 그 사회를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집안 환경과 경제력과 상관없이 청소년들은 모두 자신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 올바른 사회 아닐까?

저는 집안 형편으로 인한 교육 격차를 피부로 느끼며, 이러한 문제를 제가 직접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공교육 온라인 교사가 되어 가정 형편이 어려워 사교육을 못 받는 아이들도 질 높은 교육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공교육만으로도 충분한 환경을 조성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가정 형편으로 인해 공부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진학하고 싶은 대학교가 생겼지만, 학교 선생님들과 입시 상담을 할 때마다 서울로 학교를 가면 경제적 부담이 커질 텐데, 부산에 있는 대학교로 가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들었습니다. 대학 원서를 넣으며, 저는 또 한 번의 현실의 벽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고집하는 것은 어쩌면 저밖에 모르는 철부지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집안 형편으로 대학교 선택까지 양보한다면 제 가슴에 큰 응어리가 생길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학교만큼은 오로지 제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2개, 3개를 하더라도 반드시 어머니에게 더 이상의 부담은 안겨드리지 않고, 오로지 내 힘으로 해내겠다는 일념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전 제가 가장 가고 싶었던 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고, 야심 차게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의 많은 우려와는 달리 국가 장학금과 학교 장학금을 통해 생각보다는 생활에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근로장려금-수혜자-공모전

물론 등록금 외에 지불해야 하는 기숙사비와 한 달 생활비가 부산에서 살 때보다는 많이 나갔지만, 저는 과외와 음식점 서빙, 학원 조교 아르바이트를 하며 직접 생활비를 벌어 살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저를 보고 힘들지 않으냐며, 신기해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힘들기는커녕 제가 어머니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생활비를 벌어 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습니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근로의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학생 때는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며 빨리 일을 해서 어머니를 편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었는데, 대학생이 된 후 아르바이트를 하여 실질적으로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는 것이 저의 기쁨이자 인생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교 2학년이 되면서 20년 동안 하시던 장사를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이제 어머니와 20년을 함께 하던 좁고 낡은 가게는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어머니와 오빠와 함께 외식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일상적이어서 아무 느낌도 없을 수 있는 가족 외식이겠지만, 저는 가족들과 낮에 식당에 와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안정을 찾아가고, 저 또한 대학교 졸업을 향해 순조롭게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되고, 이에 따라 개인 PC의 사용이 늘어났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쓰던 노트북이 먹통이 된 것입니다.

당장 노트북을 새로 구입하지 않으면 수업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늘 아르바이트를 해왔지만, 주거비와 생활비를 해결하고 어머니께 생활비를 도와드리고 나면 제게 남는 돈은 없었기 때문에, 당장 노트북을 살 돈은 아예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가게를 정리하신 어머니께 손을 벌리는 건 제 마음에 큰 돌덩이를 얹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정말 거짓말 같게도 몇 달 전 신청해 놓은 근로장려금 150만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또 한 번 좌절하고 밑바닥을 찍을 뻔했던 제게 그 순간 들어온 근로 장려금은 포기하지 말라며 내미는 손길 같았습니다. 저는 근로장려금으로 노트북을 구입하고 남는 돈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저축해놓았습니다. 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열심히 학교 수업을 듣고 평소처럼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근로장려금-체험수기-공모전

그러다 몇 달 뒤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원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여 비대면으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만 카메라를 켜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연락하여 카메라를 켜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제게 금방이라도 울 듯한 목소리로 집에서 쓰는 컴퓨터에 카메라가 달려 있지 않은데, 카메라를 따로 살 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망치로 가슴을 쿵 하고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학생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저는 결국 노트북을 구입하고 남은 근로장려금으로 그 학생에게 카메라를 사주었습니다. 혹여 이렇게 베푸는 선행이 그 학생에게는 상처로 남을까 학원에 남는 카메라가 있는데 필요하면 가지라고 전해주었습니다.

저는 근로 장려금이 나비효과를 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나비효과란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날씨 변화를 일으키듯, 미세한 변화나 작은 사건이 추후에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로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근로장려금이 없었다면 저는 3년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노트북 한 대 살 수 없는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또 절망하고 꿈에 대한 좌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근로장려금으로 제 어려움을 해결하고,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며 또 한 번 희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직 저의 꿈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즉, 근로 장려금의 나비효과도 아직 현재 진행형입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모여 큰 변화를 일으키듯, 저는 끝없는 노력을 통해 꿈을 이루고 대한민국의 교육 격차를 줄이겠다는 신념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엔 제가 가장 막막했던 시기에 저를 도와준 근로장려금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저는 제가 가진 것을 사회에 환원하여 제가 받았던 도움의 손길을 다른 이에게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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